일탈캠핑
일탈캠핑은 경북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인근에 가볼만한 관광지는 영천 만취당, 영천 청제비, 신흥사가 있고, 주변에 다른 캠핑장으로 영천 솔롱고 글램핑, 금박산관광농원, 나무와학교, 치산 관광지 캠핑장, 늘푸른 민속문화 체험학교가 있습니다.
캠핑장 주요 정보
야영장 사이트 수 | 전화문의 | ||
편의시설 | 전화문의 | ||
동계캠핑 | 전화문의 | ||
반려동물 출입 | 전화문의 | ||
땅바닥형태 | 전화문의 | ||
지번주소 | 경북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 84-1 | ||
전화번호 | 전화번호 보기 |
주변 관광지 3개
주변 캠핑장 5개
영천 솔롱고 글램핑은 경북 영천시 금호읍 약남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기, 온수, 화장실, 샤워실, 취사장, 매점 등의 편의시설과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금박산관광농원은 경북 영천시 대창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장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나무와학교는 경북 영천시 대창면 어방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잔디 사이트가 구성되어 있고, 화장실, 샤워실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치산 관광지 캠핑장은 경북 영천시 도남공단3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온라인실시간예약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전기, 온수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늘푸른 민속문화 체험학교는 경북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49개의 사이트가 구성되어 있고, 전기, 온수, 화장실, 샤워실, 취사장, 매점, 장작판매 등의 편의시설과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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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랜드캠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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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학교
영천 만취당, 2.8km
주소 : 경북 영천시 금호읍 종동길 25
만취당은 건물은 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인 지산(芝山)조호익(曺好益) 선생의 7세손이며 정조5년(1781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曺學臣, 1732~1800) 선생이 살던 집으로 만취당은 사랑채에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은 주택에도 영향을 미쳐 한 집안 내에서도 남녀의 처소를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하였으며 조상에 대한 제례를 중시하여 사당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 집은 안채와 중사랑채 및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사당 뒤쪽에는 신주를 모셔다 제사드리는 별묘(別廟) 및 보본재(報本齋) 등이 배치되어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집 뒤의 마을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은 선생이 손수 심어 이루어낸 것으로 전한다. * 수량 - 목조와가 * 소유자 - 조익현 * 조학신 치재 선적(善迪)의 아들로 태어남에 도량과 사람됨이 뛰어나다. 1759년에 영조의부름에 나아가 칼 쓰는 시합을 보였더니 임금님이 장하다고 크게 칭찬하여 사복(司僕) 내승(內乘)으로 임명하였다. 내직으로는 국가의 중요직책을 맡았고, 밖으로는 여러 골의 목사(牧使)로 지냈다. 선생이 백성을 다스림에 정성을 다하니 정조께서도 높이 칭찬하여 규장각지(奎章閣誌)와 대전통편(大典通偏)등을 각각 1부와 말 한필을 하사하였다. 세상을 하직함에 임금으로부터 부조와 제문이 내려졌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만취당은 건물은 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인 지산(芝山)조호익(曺好益) 선생의 7세손이며 정조5년(1781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曺學臣, 1732~1800) 선생이 살던 집으로 만취당은 사랑채에 붙인 이름이다. ...
영천 청제비, 3.4km
주소 : 경북 영천시 도남동 산7-1
영천 청제라는 저수지의 건립 경위와 그 과정을 기록한 신라 시대의 비석이다. 이 비(碑)는 자연판석(自然板石)으로 윗쪽이 넓어, 흡사 부채꼴 모양이다. 비수(碑首)는 본래 없고, 비의 받침의 유무도 알 수 없다. 비 전면에는 청못을 축조할 때의 사연이 적혀 있다. 이 비의 서남쪽 5m에 청제 중(重)립비가 서있는데, 청제비가 여기에 세워진 사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천의 남쪽에 청제(보통 "청못"이라 함)가 있는데 이 못의 북쪽에 비가 있다. 그글에 "당나라 정원14년(798)에 임금이 양내사(兩內史)를 보내서 인부 14,800여명을 시켜 못을 막고 비를 세워 전말(顚末)을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개 이 못의 관개(灌漑)는 300여석이라 지금도 이익을 보고있는데 지난 순치(順治) 계사년(1653년)에 어떤 사람이 절단한 바가 되어 흙속에 묻혀, 그 고적(古跡)이 부전(不傳)함을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여기에 고쳐세워 이같이 기록한다. "아! 후인이 이 비로 말미암아, 이 못을 폐(廢)해서 안되는 까닭을 생각하게 된다면 이 비가 이못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강희(康熙) 27년(1688) 9월" 삼국 및 통일신라 양시대에 걸쳐 양면비(兩面碑)는 이것이 처음이고 농업수리비(農業水利碑)로서 제자리에 1200여년이 넘도록 서있는 것도 이 비가 처음이다. 이 청제비가 노천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0년에 비각을 세움으로써 보존할 수가 있었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영천 청제라는 저수지의 건립 경위와 그 과정을 기록한 신라 시대의 비석이다. 이 비(碑)는 자연판석(自然板石)으로 윗쪽이 넓어, 흡사 부채꼴 모양이다. 비수(碑首)는 본래 없고, 비의 받침의 유무도 알 수 없다...
신흥사(영천), 4.7km
주소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금호로 360-29
문의 : 054-334-1101
신흥사(新興寺)는 영천시 금호읍 신월리 205-1번지 유봉산(遊鳳山)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절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많은 전란으로 불타 버리고 또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사라진 빈 터에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탑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영천시 금호읍 신월동 삼층석탑도 절터가 논밭으로 변하고 저수지로 변하는 세월을 견디고 홀로 서있다. 영천시에서 금호읍 쪽으로 국도를 따라 조금가면 땀고개가 있고 고개를 넘어서면 금호강변의 평지가 전개되면서 길 왼편에 탑못이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신월동 삼층석탑은 그 못둑 바로 아래, 금호강을 바라볼 수 있는 고개 아래쪽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영천시 한가운데를 감돌아 흘러가는 금호강 300리 물길은 변함없이 흐르고 석탑도 세월의 물길을 흘려보내고 있다. 탑이 속했던 절 이름이 무엇인지, 그 규모는 어떠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어떤 유물도 어떤 자료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 얼굴에서 우린 많은 이야기를 읽어낸다. 신월동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하대의 석탑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기단은 상층과 하층의 중대석에 탱주가 하나씩 새겨졌으며, 상층기단 면석에는 탱주로 분할된 여덟 개의 면에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다. 앉은 자세로 표현된 팔부중상은 마모가 상당히 진행되어 조각의 특징이나 우열을 말하기 어려운 형편이며, 다만 상체에 비해 하체가 약하여 다소 신체의 비례를 잃고 있다는 점 정도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세 개의 몸돌 가운데 제1층 몸돌에는 조작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4면에 모두 문비를 새기고 그 안에 똑같은 모양의 자물쇠와 문고리를 도드라지게 아로새겼다. 보통 몸돌의 앞면 또는 앞뒤 양면에 문비와 자물쇠를 조각하는 경우는 더러 볼 수 있지만 이 탑처럼 면마다 이런 무늬를 같게 새기는 경우는 별로 없으므로 이 부분이 신월동 삼층석탑의 특색이라 하겠다. 지붕돌은 층급받침이 넷으로 줄었으며, 귀마루와 낙수면이 그리는 곡선의 반전도 아주 심한 편은 아니나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의 완성기에 비하면 다소 진전되어 시대의 내려옴을 감출 길 없다. 그러나 아직도 처마선은 일직선을 유지하고 있어 앞시대의 여운이 남아있기도 하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져 3층 지붕돌 위로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3.69m로 크지는 않지만 기단부가 튼실하고 각 부분의 비례도 좋아 바라보는 눈맛이 괜찮은 편이다. 보물 제465호이다. 근년에 신흥사라는 새 절이 생겨 이 석탑을 관리하고 있으며 사찰 내에는 법당 및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는데 석탑은 법당 앞마당을 지키고 있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신흥사(新興寺)는 영천시 금호읍 신월리 205-1번지 유봉산(遊鳳山)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절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많은 전란으로 불타 버리고 또 알려지지 않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