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장 상세 정보
* 땅바닥 형태(전화문의)
잔디 | 데크 | 파쇄석 | 맨흙 | 기타 |
* 이용조건
화로대사용 | 동계캠핑 | 반려동물출입 |
* 편의시설
전기 | 온수 | 샤워실 | 매점 | 장작판매 |
온수샤워 | WiFi | 장비대여 | 수영장 | 운동장 |
* 주변시설
낚시 | 해수욕장 | 계곡 | 산책로 | 강 |
호수 |
* 숙박시설
카라반 | 팬션 | 방갈로 | 글램핑 |
죠스글램핑은 경기 동두천시 삼육사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온라인실시간예약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전기, 온수, 매점, 장작판매, Wi-Fi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인근에 가볼만한 관광지는 소요산탑유황온천, 동두천시, 양주 회암사지가 있고, 주변에 다른 캠핑장으로 그림책동화마을 품 캠핑장, 벨라캠핑장, 인디언숲 캠프닉, 탑 캠핑장, 산촌오토캠핑장이 있습니다.
야영장 사이트 수 | 전화문의 | ||
글램핑 시설 개수 | 10개 | ||
글램핑 시설 | 침대,TV,에어컨,냉장고,유무선인터넷,난방기구 | ||
예약방식 | 온라인실시간예약 | ||
편의시설 | 전기, 온수, 매점, 장작판매, Wi-Fi | ||
동계캠핑 | 가능 | ||
반려동물 출입 | 가능 | ||
땅바닥형태 | 전화문의 | ||
도로명주소 | 경기 동두천시 삼육사로 1422-34 (탑동동) | ||
전화번호 | 전화문의 | ||
홈페이지 | 홈페이지로 이동 |
잔디 | 데크 | 파쇄석 | 맨흙 | 기타 |
화로대사용 | 동계캠핑 | 반려동물출입 |
전기 | 온수 | 샤워실 | 매점 | 장작판매 |
온수샤워 | WiFi | 장비대여 | 수영장 | 운동장 |
낚시 | 해수욕장 | 계곡 | 산책로 | 강 |
호수 |
카라반 | 팬션 | 방갈로 | 글램핑 |
그림책동화마을 품 캠핑장은 경기 동두천시 삼육사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온라인실시간예약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파쇄석 사이트가 구성되어 있고, 전기, Wi-Fi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벨라캠핑장은 경기 동두천시 탑신로237번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온라인실시간예약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총 32개의 사이트가 구성되어 있고, 전기, 온수, 장비대여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인디언숲 캠프닉은 경기 동두천시 천보산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온라인실시간예약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전기, 온수, 매점, 장작판매, Wi-Fi, 장비대여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탑 캠핑장은 경기 동두천시 천보산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촌오토캠핑장은 경기 동두천시 탑동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게시판예약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데크, 파쇄석 사이트가 총 30개로 구성되어 있고, 전기, 온수, 화장실, 샤워실, 취사장, 매점 등의 편의시설과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소요산탑유황온천, 4.1km
주소 : 경기도 동두천시 장고갯로 161-35
경기도 동두천시에 위치한 소요산탑유황온천은 2013년 2월에 온천 개발을 시작하여 2013년 7월에 개장했다. 유황온천이란 온천수 1리터 당 유황성분이 1mg 함유된 것을 말하는데, 소요산탑유황온천의 온천수는 1리터당 유황성분이 5mg 함유되어 있다. 또한, 지하 976m에서 용출된 유황온천인 만큼 수질이 굉장히 매끄러우며, 피부노화 방지, 각종 성인병, 당뇨, 고혈압, 신경통, 부인병, 관절염, 각종 피부질환에 효능이 있다. 유황온천탕뿐 아니라 그 외 레저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가족단위로 찾아오기 좋다. 총 5층 건물 중 2층에는 유황온천탕, 3층에는 초대형 불한증막과 4계절 실내수영장, 대형 휘트니스센터를 겸비한 찜질방, 4층에는 마사지실, 지압길을 포함한 힐링공간, 옥상에는 하늘공원이 있다. 특히, 3층 찜질방 시설 내 초대형 불한증막의 경우 불을 뗄 때 소나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은은한 소나무 향과 함께 개운한 찜질을 할 수 있어 인기가 좋다. 소요산, 왕방산 근처에 자리 잡고 있어 등산 후 유황온천욕으로 피로를 푸는 등산객이 많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경기도 동두천시에 위치한 소요산탑유황온천은 2013년 2월에 온천 개발을 시작하여 2013년 7월에 개장했다. 유황온천이란 온천수 1리터 당 유황성분이 1mg 함유된 것을 말하는데, 소요산탑유황온천의 온천수는 1리터...
동두천시, 4.2km
주소 : 경기도 동두천시
문의 : 031-860-2114
경기도의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포천군에 서쪽과 남쪽은 양주시, 북쪽은 연천군에 접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95.66㎢이며, 인구가 96,589명(2012년 6월말 기준)에 이르고, 8동 145통 1,169반이 있으며 시청소재지는 생연동이다. * 자연환경 추가령지구대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로 지구대방향인 북동 남서 방향으로 통곡이 발달하여, 이를 따라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다. 지구대의 동쪽과 서쪽에는 소요산, 국사봉, 왕방산, 해룡산, 마차산 등 비교적 급경사인 산지가 발달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를 강화천이 시의 중앙부를 관류하며 북쪽으로 흘러 한탄강에 들어가고 있다. * 역사 고대 -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남진으로 한강의 북방은 물론 천안, 아산, 청주, 죽령, 조령을 연결하는 일대가 고구려의 세력권에 있었던 475년(장수왕 63)경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매성군, 창화군으로 불렸다. 551년(성왕29) 나제동맹군이 한강유역을 점령했을 때는 일시 백제영토로 복귀되었다가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되어 757년(경덕왕16) 내소군으로 되었다. 고려 - 고려 태조 때에 이르러 내소군은 견주로 바뀌었고 그 뒤 1308년(충렬왕34) 한양부로 개칭되었다. 조선 - 1413년(태종13)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430년 (세종12)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며, 세조 때에 이르러 사천현이 폐합되었다. 사천현은 지금의 은현, 동두천 일원으로 고구려 때 내을매현이던 곳이며, 신라 때 사천으로 개칭된 이래 고려 때로 사천으로 불리어 오다가 양주에 병합된 곳이다. 근대 - 1895년 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 일제의 면 중심 행정에 의하여 이담면으로 변경되었다. 여러 차례의 행정제도 개혁과 행정구역개편이 실시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군중심의 행정에서 면중심 행정으로 전환시켰다. 이에 따라 3~4개 군현을 1개 군으로 통합하고 이에 면단위 행정구역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다시 현 동두천시 영역은 양주군 이담면이 주요지역이었다. 현대 - 미보병 7사단이 주둔한 이래,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여 도시로 발전하면서 1963년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동두천시로 승격되었다. * 문화 소요산의 아름다운 단풍을 자랑하며 여러 가지 시민을 위한 행사를 하는 소요문화재가 10월 중에 개최된다. * 향후 추진사업 탑동계곡 관광지 개발, 동두천 관광특구개발 (보산, 생연, 소요동, 소요산)
출처 : 한국관광공사경기도의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포천군에 서쪽과 남쪽은 양주시, 북쪽은 연천군에 접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95.66㎢이며, 인구가 96,589명(2012년 6월말 기준)에 이르고, 8동 145통 1,169반이 있으며 시청소재...
양주 회암사지, 5.1km
주소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14
회암사는 고려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하였고,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이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 이후 성종3년(1472)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시켜 중창 시켰으나, 당시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부터 회암사는 여러 차례 유생의 상소와 함께 특히 명종 때 불교를 중흥하려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보우대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후 보우대사가 유배지에서 피살되고 덩달아 회암사 승려까지 미움을 받게 되니 200여년 동안 번성하던 회암사는 빈 집이 되어 버렸다. 이 때부터 점차 퇴폐해지기 시작하여 어느 때인지 모르게 풍상과 함께 회암사는 인멸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번성기 때 회암사의 규모는 전각이 총 262간이었고, 암자도 17개나 되었으며 또한, 모셔진 불상도 15척짜리가 7구나 있었다고 하며,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어 당시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기가 동국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운허요하가 쓴 "천보산 회암사 대웅전 창건기"에 의하면 1828년에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조그만 암자를 지어 가람을 수호하고, 옛 회암사를 잇게 했으며,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대사가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어 오늘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다. 후설에 의하면 회암사의 폐사는 빈대가 많아 불을 태워 없앤 절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소실됐다는 설도 있고 또한 절의 크기에 대해서 가마솥 안에 들어가 팥죽을 쑬 만큼 절의 규모가 컸다고 하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쌀을 씻는 함지박이 너무 커 사람이 빠져 죽어도 모를 정도였으며, 전국을 다니다가 만나는 승려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회암사에서 왔다고 할 만큼 승려 수가 많았다"고 한다. 옛 회암사는 문헌상 동방의 첫째였고 우리나라의 국찰이었으나 폐허가 된 후 사지에 석벽과 기단, 계체 등 일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적지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원형 그대로 발굴한 후 문화와 역사적 가치창출로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있다. * 문화재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 387호), 회암사지 부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 멧돌 (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9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0호), 무학대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 부도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2호), 회암사지 당간지주 (향토유적 제13호)
출처 : 한국관광공사회암사는 고려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하였고,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