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장 상세 정보
* 땅바닥 형태(전화문의)
잔디 | 데크 | 파쇄석 | 맨흙 | 기타 |
* 이용조건
화로대사용 | 동계캠핑 | 반려동물출입 |
* 편의시설
전기 | 온수 | 샤워실 | 매점 | 장작판매 |
온수샤워 | WiFi | 장비대여 | 수영장 | 운동장 |
* 주변시설
낚시 | 해수욕장 | 계곡 | 산책로 | 강 |
호수 |
* 숙박시설
카라반 | 팬션 | 방갈로 | 글램핑 |
노마드 캠프는 경기 남양주시 경춘로611번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에 가볼만한 관광지는 남양주 홍릉과 유릉, 남양주 사릉, 나만갑선생신도비가 있고, 주변에 다른 캠핑장으로 구리 토평 가족캠핑장, 라라차차캠핑장, 사노리숲캠핑장, 덕소캠핑장, 미사리 가야공원 캠핑장이 있습니다.
야영장 사이트 수 | 전화문의 | ||
편의시설 | 전화문의 | ||
동계캠핑 | 가능 | ||
반려동물 출입 | 불가능 | ||
땅바닥형태 | 전화문의 | ||
도로명주소 | 경기 남양주시 경춘로611번길 11-44 (일패동) | ||
전화번호 | 전화문의 |
잔디 | 데크 | 파쇄석 | 맨흙 | 기타 |
화로대사용 | 동계캠핑 | 반려동물출입 |
전기 | 온수 | 샤워실 | 매점 | 장작판매 |
온수샤워 | WiFi | 장비대여 | 수영장 | 운동장 |
낚시 | 해수욕장 | 계곡 | 산책로 | 강 |
호수 |
카라반 | 팬션 | 방갈로 | 글램핑 |
구리 토평 가족캠핑장은 경기 구리시 왕숙천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화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라라차차캠핑장은 경기 구리시 사노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노리숲캠핑장은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459번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덕소캠핑장은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쇄석 사이트가 총 36개로 구성되어 있고, 전기, 화장실, 샤워실, 취사장, 매점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미사리 가야공원 캠핑장은 경기 하남시 미사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게시판예약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데크, 맨흙 사이트가 총 67개로 구성되어 있고, 전기, 온수, 화장실, 샤워실, 취사장, 매점, 장작판매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3.3km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금곡동)
문의 : 031-591-7043
*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를 모신 곳, 홍릉.유릉(홍유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와 그 비를 모신 이곳은 사적 제 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릉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고, 유릉은 27대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황후 민씨 및 계비 순정황후 윤씨를 모신 능이다. 원래 홍릉은 명성황후 민씨의 능으로서 서울 청량리에 있었으나 고종의 승하로 국장할 때 이곳에 옮기어 함께 모셨다. 유릉은 원래 순명황후 민씨의 능으로 양주 용마산에 있었으나 순종 인산 때 이곳에 이장하였고, 1966년 순정황후 윤씨를 또한 이곳에 함께 모셨다. 홍릉과 유릉은 종래의 왕릉과 형식이 다르며 모두 광무 이후 황제라 칭하던 왕이었던 만큼 명태조의 효릉을 본따서 조영하였다. 종래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고 그 앞쪽으로 문무석을 세우고,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으로 석수를 세워 놓고 있다. 홍릉 석물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만들어진데 대하여 유릉 석물은 사실적이고 개성적이며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다. 청량리에서 경춘가도를 가다 도농동 삼거리 검문소에서 춘천쪽으로 약4km 지점 오른편에 울 창한 소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 홍릉과 유릉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왕·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는 정책을 펼쳤다. 왕의 무덤인 능陵도 세자의 무덤인 원園도 아닌 일반인의 무덤인 묘墓로 격하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왕공가궤범을 따르자면 고종과 순종의 무덤은 왕릉이 될 수 없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의 유릉이었다. 고종의 장례 때는 명성황후의 재궁을 원 홍릉(청량리)에서 현 홍릉(남양주시)으로 옮겨와 합장하였고, 순종의 장례 때에도 구 유릉(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모셔와 합봉(남양주시)하였다. 새로운 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이것을 막을 법적인 근거가 없었으며, 능의 이장 문제 또한 이왕직이나 총독부가 관여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실 내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별 탈 없이 처리되었다. 그러나 본래 왕릉 장법에서는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경우엔 새로운 능호를 쓰게 되어 있다. 중종이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같이(이때의 경우 한 구역 안 두개의 능침이라 하여 동원 이강이라 한다. 봉분은 따로 떨어져 두개이지만 제사는 한 정자각에서 받는다)안장되었을 때 희릉의 능호를 같이 쓸 수 없다 해서 정릉으로 능호를 새로 올렸던 전례가 있고,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에 묻을 것을 미리 지시했기 때문에 인현왕후의 능호인 명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이 경우는 봉분이 붙어있어서 쌍릉이라고 한다). 원래 왕릉 장법에 따르면 새로운 능호를 써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의 간섭으로 인하여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를 모신 곳, 홍릉.유릉(홍유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와 그 비를 모신 이곳은 사적 제 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릉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
남양주 사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3.6km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1 (진건읍)
*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조선 왕조 시대 때 가장 비운의 여인으로 꼽히는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定順) 왕후(1440∼1521년)는 1453년 왕비로 간택되었으며 2년 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덕(懿德) 왕대비에 봉해졌다. 하지만 1457년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있는 유배지로 보내지고 정순 왕후도 부인으로 강봉된다. 그 해 단종은 사사되면서 정순 왕후는 궁궐에서 추방당해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들어가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왕후는 늘 통곡하였으며, 이로 인해 동정곡(同情哭)과 동망봉 이외에도 많은 유래가 생겼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정순왕후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세조가 내린 집과 식량을 끝내 받지 않았다. 평생을 청빈(淸貧)하게 살다간 정순 왕후는 죽어서도 여인네들의 한을 달래는 토속신으로 숭앙되었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하지만 살아 생전 생이별을 해야 했던 두 분은 죽어서도 같이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어, 한 곳으로 모으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 사능의 형태 * 사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봉분 앞에 상석 1좌, 상석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1쌍이 배치되어 있고, 그 바깥쪽으로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다. 그 아랫단에는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그리고 장명등이 있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조선 왕조 시대 때 가장 비운의 여인으로 꼽히는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定順) 왕후(1440∼1521년)는 1453년 왕비로 간택되었으며 2년 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나만갑선생신도비, 4km
주소 : 경기 구리시 사노동 산 163번지
신도비란 종2품 이상의 관원의 묘가 있는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석으로 정3품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벼슬을 한사람이 택술(擇述)하는 것이 예이다. 나만갑(1592~1642)선생의 본관은 안정(安定)이며 자는 몽뢰(夢賚)호는 구포(毆浦)이며, 광해군 5년(1613)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 유폐 사건으로 낙향, 오로지 학문에 열중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순릉참봉에 배수되었다 그 해에 알성문과에 응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그후 홍문관 교리로 있던 때에 당쟁에 휘말려 강동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27(인조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서 인조를 보위 하였다. 환도후 병조정랑,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등을 두루 거친후 1635년 형조참의로 임금을 보위하였다. 이어 병조 참의가 되고 무고로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1639년 영주에서 사망하였으며, 후에 좌의정으로 추증(追曾)되었다. 저서로는 (병자록:丙子錄)(구포집:毆浦集)이 있으며 신도비의 글은 청음 김상헌이 글을 지었고, 추기(追記)는 동춘당 송준길이 쓰고 손자 양좌(良佐)가 지었다. 이외에도 문곡 김수항이 지은 지명(誌銘)과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지은 묘표(墓表)가 있다. 1985년 6월 28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신도비란 종2품 이상의 관원의 묘가 있는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석으로 정3품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벼슬을 한사람이 택술(擇述)하는 것이 예이다. 나만갑(1592~1642)선생의 본관은 안정(安定)이며 자는 몽뢰(夢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