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양화나루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내양리 양화동과 대신면 초현리를 이어주는 조선시대의 나루터로 ‘내양나루’라고도 하였다. 곡수장을 찾는 이들이 소를 팔기 위해 이 나루를 이용했다고 한다. 강변에서 바라보는 여주 강변의 경치가 멋지다.
주요 정보
지번주소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양화동 내양리 350번지 일대 | ||
전화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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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관광지 3개
주변 캠핑장 5개
흙의 사랑 캠핑장은 경기 여주군 농서면 번도리 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77개의 사이트가 구성되어 있고, 전기, 온수, 화장실, 샤워실, 취사장, 매점 등의 편의시설과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양섬지구 야영장은 피크닉 장소로 더욱 좋으며 근처에 양섬야구장이 있습니다. 경기 여주시 하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1개의 사이트가 구성되어 있고, 화장실, 샤워실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포보오토캠핑장은 경기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착순예약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잔디, 맨흙 사이트가 총 60개로 구성되어 있고, 전기, 화장실, 샤워실, 취사장, 장작판매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두리캠핑장은 경기 여주시 이여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쇄석 사이트가 총 12개로 구성되어 있고, 전기, 온수, 장작판매, Wi-Fi 등의 편의시설과 운동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인디언 캠핑장은 경기 여주시 현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게시판예약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총 65개의 사이트가 구성되어 있고, 전기, 온수, 화장실, 샤워실, 취사장 등의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조선효종영릉재실, 4.1km
주소 : 경기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문의 : 031-885-3123
* 조선시대 재실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는, 조선효종영릉재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며, 재실(齋室)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하였으며, 그 앞에 재실을 건립하였다. 이후 176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조선효종영릉재실의 구조와 역사적 의의 *일반적인 조선시대 재실은 재방, 안향청, 제기고,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이곳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잘 되어 있다. 또한 경내의 재향과 관계 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호) 등의 고목도 함께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문화재 정보]지정번호 : 보물 제1532호 지정연도 : 2007년 11월 29일 시대 : 조선시대 종류 : 가옥
출처 : 한국관광공사* 조선시대 재실의 형태가 보존되어 있는, 조선효종영릉재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며, 재실(齋室)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4.2km
주소 :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왕대리)
[영릉(英陵)]* 세종대왕의 생애와 영릉(英陵)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태종12년(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고 스물두살 되던 태종18년(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해 음력 8월10일 (양력 9월18일) 22세의 나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이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여러 왕자중에서 가장 총민하고 현명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의 원형을 이루었던 우리 민족은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국토·언어·문화·민족정신을 공통으로 하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영릉의 특징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인 영릉의 구조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그 좌우 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게 된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씩 여덟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전시유물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있으며, 세종전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발 명하여 사용한 과학기구, 악기류와 세종대에 간행된 책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세종전 앞 야외유물전시장에는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각종 복원유물들이 전시되어있어 세종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행사안내문화재청은 대왕의 탄신일을 맞아 매년 양력 5월 15일(오전 10시 30분) 세종대왕의 유덕과 위업을 기리는 숭모제전 행사를 국가행사로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 주요인사, 세종대왕위업 선양단체, 일반 관람객이 참석하여 세종대왕릉 정자각에서 봉행하는 데 2002년에는 탄신 605돌이 된다. 탄신 다례행제 에는 대왕이 친히 지으신 봉래의를 국립 국악원 연주단 및 무용단데 의해 공연되며, 해마다 세종시대의 과학유물을 복원하는 제막식을 거행한다. 또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영릉봉향회 주관으로 세종대왕 승하일 기신제는 매년 양력 4월 8일 정오 12시에 종친관계자 300여명의 참석으로, 소헌왕후 기신제는 매년 양력 4월 28일 정오 12시에 각각 개최된다.* 세종대왕의 업적1) 한글창제대왕은 궁중에 정음청을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지도하여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연후인 1446년 9월(음력) 에 이를 반포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통한 우리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한글은 그 원리나 형태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익히기 쉽고 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글 창제의 더 큰 의의는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던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위하여 우리의 글을 만들어 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2) 학문창달대왕은 특히 학문을 사랑하여 집현전을 부활하여 우수한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고 옛 제도를 연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하였다. 우선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 개량활자를 만들어 월인천강지곡·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석보상절·의방유취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여 전제(田(전)제)와 세제를 정비하는 등 문물제도를 크게 개건하였다. 3) 과학의 진흥대왕은 국민을 위하여 농업을 진흥하려는 데 뜻을 두고 한 평생을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을 연구 보급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장영실, 이천 등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대·소간의, 일성정시의, 혼천의, 시간을 재는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등 을 만들었다. 또한 측우기를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강우량을 측정토록 했으며 수표를 만들어 하천의 수위를 재게하고 외국의 역법(曆法)을 참작하여 역서와 천문도를 제작했다. 이리하여 천문·지리 등 과학기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4) 외치와 국방대왕은 역대로 신사상과 신기술의 통로였던 중국의 명나라와의 교류정책을 적극 펼치는 한편 바다를 건너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를 응징하여 이종무 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3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선진관계를 도모하였다. 북방으로는 최윤덕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야인을 평정케하여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을 확정시키는 등 국력을 강하하였다. 5) 음악의 정리조선 초기 까지의 음악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음악과 중국음악이 서로 혼합되어 무질서한 상태였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정리하였는 데, 이는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이었다. 대왕은 박연 등으로 하여금 각종 악기를 만들게 하고 특히 편경과 편종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악곡·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여 바로잡아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영릉(寧陵)]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효종대왕릉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 (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효종대왕릉의 형태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조선시대 왕릉의 형태를 보면 세조 때부터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있었으나,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부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릉(寧陵)에서 다시 사라져 왕릉 배치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이 구성되어 있다.* 대동법과 상평통보, 효종에 대하여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그 후 풀려 나와서 1646년(인조 23)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 27)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문화재 정보]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지정연도 : 1970년 5월 26일 시대 : 조선시대 종류 : 왕실무덤
출처 : 한국관광공사[영릉(英陵)]* 세종대왕의 생애와 영릉(英陵)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
여주시, 7km
주소 : 경기도 여주시
문의 : 031-883-2114
경기도의 최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 서쪽은 이천시, 광주시, 남쪽은 충청북도 음성군과 충주시, 북쪽은 양평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면적은 607.9㎢이며 인구는 109,469명(2013년 9월 기준)이다. 2013년 여주군에서 여주시로 승격되었다. * 자연환경 북쪽에는 양자산의 산지가 동서로 뻗어, 광주군과의 경계에 천덕봉이,양평군과의 경계에는 고래산, 파사산 등이 솟아 있다. 한강은 강원도와의 경계에서 섬강, 남서부 평지를 흐르는 청미천, 양화천, 복하천, 북부 산지에서 발원하는 금당천 등을 합치며 북서방향으로 군의 중앙부를 관류하며 여주시를 강남과 강북으로 나눈다. * 역사 고대 - 초기에는 백제의 요충지였다. 광개토대왕 때 잠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다시 백제에 속하기도 하였으나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475년 (장수왕63)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여 골내근현이 되었다. 그 뒤 신라의 영토에 속하였다가 경덕왕 때에는 황효라 불렸다. 고려 - 940년(태조23) 황려현으로 고쳐졌고,1018년(현종9) 강원도 원주 임내에 속하였다가, 1031년 (현종22) 다시 경기도로 복구되었다. 고종 때 영의로, 1305년(충렬왕31) 여흥으로 고치고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지군사를 두었다. 1388년(우왕14) 군에서 부로 승격되어 황려라 하였다가 1389년(공민왕1) 여흥군으로 강등되었다. 조선 - 1401년(태종1) 다시 부로 승격되었고, 음죽현의 어서이촌이 여흥군에 병합되었다.1413년(태종13)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469년(예종1) 여흥에 병합되면서 목으로 승격되었다.천령현은 1018년(현종9) 광주에 예속되어 감무를 두었다가 1413년(태종1) 현으로 되었고, 1469년(예종1) 고을을 없애 면서 여주에 병합되었다. 근대 - 1895년 목에서 군으로 강등,충주부의 속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로 환원되어 3등군으로 되었다. 1914년 원주의 지내면과 서면이 여주시에 편입되었고, 주내면이 여주면으로 개칭되면서,북내, 강천, 흥천,능서, 금사, 개군, 가남, 점동, 대신등 10개 면이 되었다. 1941년 여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 - 1963년 개군면이 양평군에 편입되었고 1970년 금사면 산북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9년 산북면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 문화 문화재 - 세종의 업적과 얼을 기리기 위하여 행해지는 세종문화 큰잔치는 1960년 한글학회에서 한상억의 제의로 결정된 뒤 여주, 수원, 인천 등지에서 한글 백일장, 시화전, 서예전, 여주 영릉능전 기념식 등이 거행되어왔다. 행사 내용은 전야제인 원찰의 밤과 본행사인 길놀이 '가장행렬'로 나뉘어진다. 민속 - 흔암리쌍룡거줄다리기, 여주답교놀이, 해촌 낙화놀이 등이 있는데, 그 중 쌍룡 거줄다리기는 흔암리, 강천면 굴암리 등 12개 마을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에 모여 줄다리기를 하며 그 해의 풍년과 태평성제를 기원하는 것이다.또한 이 놀이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던 시절 도처에서 몰려온 뱃사람들이 얼어붙은 강물이 풀리기를 기다리면서 이 마을에 머무를 때 행하던 중요한 행사이기도 하였다. 동제 - 흥천면 내사리와 점동면 처리 등지에 산신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흥천면 효지리와 금사면 이포리 마을은 지금도 매년 10월 상달에 날을 가려서 낭당에서 동제를 지내며 마을의 무사 태평과 풍년에 감사하고 있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경기도의 최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 서쪽은 이천시, 광주시, 남쪽은 충청북도 음성군과 충주시, 북쪽은 양평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면적은 607.9㎢이며 인구는 109,469명(2013년 9월 기준)이...